2024.04.26 (금)

신병은의 문화예술칼럼- - 손상기의 그림에 보이는 시적 사유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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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병은의 문화예술칼럼- - 손상기의 그림에 보이는 시적 사유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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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술가를 조명함에 있어 자칫 범할 수 있는 오류는 예술정신과 작품을 떠나 예술가의 운명에 의해 객관적 평가를 흐리게 하는 경우이다.
화가 손상기도 같은 경우이다.  분명한 것은 요절할 때까지 예술에 대한 치열성과 작품에 반영된 그의 예술혼이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점, 그것이 죽어서도 우리를 그의 곁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서 그림이 곧 삶이고 삶이 곧 그림이었다.
그가 메모한 독백과 회상에서 그림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밝혀 두고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상채기 난 나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에서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의 상실,
이로 말미암은 암흑 속에서 고독과 오한을 느끼며,
아픔에 신음하는 언어를 추려내어 가혹하고 엄격한 훈련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내가 표현하는 것은 꼭 그리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인 나의 모습이고
상실이 빚은 어둠속에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며
어떤 것에서 헤어나기 위해 고함지르는 나의 모습인 것이다
이런 나의 작업은 곧 하루의 삶을 누린 일기처럼 진실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며,
이 진실의 강한 밀착만이 나를 호흡하게 하고 있고 바로 이것이 그려져야 예술이라고 알고 있다 
 
그가 첫개인전 초대의 글에서 밝힌 그림과 삶에 대한 관점이다.
그가 얼마만큼 고통 속에서 작업이 행해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으며, 육체적 결함 때문에 잃어버린 꿈들을 되찾기 위한 그의 작업. 안으로 감추어진 감정의 자유로운 분출과 의식의 흐름을 예리한 칼로 가슴을 할퀴는 듯 섬뜻한 느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의식하고 활동적이고 무엇에 관련되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들의 의식상태를 확장하고 심화함으   로써 우리들 자신이 살아있는 상태를 증대시킨다.  예술은 삶의 경험을 발견하고 고조시키고 순화시킨다
 
역사의식이 우선이냐 미의식이 우선이냐, 하지만 한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충실한 작가가 자기자신의 마음에 찰  작품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제작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역사와 분리되고 미와 구분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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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이, 호흔, 배, 변비, 다리, 신경통, 가슴, 등, 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제일 부럽다.
명산의 바위처럼 위용있게 돌출된 가슴뼈, 외봉낙타처럼 생긴 등, 5척에도 못 미치는 키,
불쌍타, 가엾다, 그가
                                                                                           -작업일지에서-
 
그에게서 작업이 얼마만큼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독백이다.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은 가난과 신체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라기 보다는 그의 모든 삶이 한데 응어리진데서 비롯된 결과였으며, 승화된 예술정신의 발현이었다.
그것은 이론을 앞세운 명목가치보다는 어떻게 하면 보편적인 삶을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끝이 없는 자기 물음에서 비롯된 경험 그 자체였다.
아픔을 아픔으로 감싸 안기 위한 몸부림,
어쩌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행복이었기에, 고통마저도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술가 고유의 의식은 강요된 또한 단순히 주어진 여러 가지 조건들 너머에서 자연의 통합, 현실의 소유, 그리고 현실의 풍요화와 인간적인 것의 확인을 지향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항상 이미 정설되어 있는 일체의 편견을 뒤엎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생각하는 바를 표명한다

그는 이러한 고지식한 고집을 배경으로 그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의 그림 세계를 이루어낸다.
자신이 어릴 때 꿈이 머물게 된 아픈 상처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한편으로 음산하고 을씨년스런 음울한 도시 풍경을 선보인다.
즉『시들지 않는 꽃』과 『공작도시』연작들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이는 회색톤의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 거친 나이프의 흔적, 메마른 꽃이 꽂혀져 있는 화병, 헐벗은 도시의 을씨년 스런 풍경, 어둡고 위험한 길,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억제된 무의식, 세상을 향한 검고 짓푸른 경멸감, 한없이 닫혀있는 그 무엇들이 호흡 가픈 숨소리로 속도감 있게 달려든다.
불안과 공포 같은 음울한 공간 속에서도 가슴 뜨겁게 타오르는 예술혼이 보는 사람의 가슴까지도 데일 것만 같아 덩달아 절규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술은 문화형태 중의 하나로서 살아가는 의식과 행동의 가치지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미술자체에 어떤 특수하고 고정적인 본질을 부여하고 이를 둘러싼 전문적 기능주의에 매달릴 떄 나는 죽어있다고 본다.  삶은 진실하게 담아내는 과정의 형식으로서 삶과 삶 사이의 공통적 소통을 이루지 못할 때 그 미술은 기능적으로 분명 죽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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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굴절의 시절을 그림으로 살아오면서 얻은 화관을 이러하다.
총체적인 의미로 문화 속의 미술은 살아가는 의식과 행동의 가치지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미술자체에 어떤 특이하고 관념적인 본질을 요구하고 이것을 유지한 전문적인 기능주의에 근거할 때 효력이 없음을 느낀다.
삶을 진실하게 표현해 보이는 과정의 형식으로서, 삶과 삶 사이의 연결을 이루지 못할 때 그것은 기능적으로도 살아있는 생명의 의미를 반영하지 못한다.  단지 재료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진정한 미술은 삶의 총체성을 인식하고, 소통하게 하는 기능 속에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림은 작가의 경험, 체험의 소산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항상 내가 포함되어 있는 현실 인식으로 작업에 임해야 한다.  나 자신의 문제에 급급했는데, 이제 현실이라는 것, 역사라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의 아픔에 대하여 직시하게 되었다.
그들과 더불어 부대끼면서 사는 삶.  거대하고 메마른 도시에 서정을 심는 삶이면 싶다.  그리고 가끔 스스로에게 충고, 격려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의 『자라지 않는 나무』에서 보이는 자신만의 문제에만 국한된 세계에서 드디어 현실이라는 것, 보편적인 사회적 삶의 문제에 시선이 옮아간다.
메마른 도시의 더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어 내기 위한 작업,
공작도시』연작은 산업화 기계화가 빚어낸 인위적이고 기계화된 삶의 허상이다. 비판적 시각에서의 현실인식, 이는 늘 변두리를 살아온 그의 자전적 체험이다.
그의 작품이 화단의 관심사로 주목받기 시작할 80년대 당시,
우리 미술계가 사회현실 속에 몸을 던지던 그때도 그는 조용한 가운데 외롭게 자신의 삶과 이웃의 삶을 보듬어 내는 내면적 응시로 작업에 임한다. 이러한 모습이 사회의 총체적 모순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대문이다. 

미술사나 현재 세계 각국에서 유행되는 조류나 유파는 아무 것도 모른다(의식하지 않는다)
감동 얻지 못하는 주제 소재는 하지 않음,
늘 친근하게 대하고 볼썽사나운 것에 애정을 느낀다
다만 모순된 작업을 통해 한 사물에의 집요한 관심과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이되는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예술가의 사명이다
예술은 삶의 경험을 발견하고 고조시키고 순화시킨다

현실에서의 발견이 가장 정직한 예술혼이자 인간적인 것을 지향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죽음 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직도 할 일을 다하지 못한 성급함이 작품의 분위기 속에 그대로 반영된다.
현실에 대한 직선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만의 현장감과 속도감을 표현한다. 그의 작업은 어떤 형식이나 방법에 따르지 않는다.

‘나는 지난날의 작업태도나 내용을 잊어버리고 늘 일렁이는 가슴속에 또 다른 것을 위해 철저한 자유 속에서 대기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작업 속에서 어떤 작품이나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삶에 투영된 현실과 운명, 뒤틀리고 헝클어진 삶의 비정한 풍경을 우울한 회색의 빛으로 정직하게 그려낸다.
시장의 행상 아줌마, 수레를 끄는 맞벌이꾼, 어부의 가족 풍경, 어부의 아내, 밤늦도록 철문을 내린 가게 앞에서 좌판을 벌려놓은 여인네들,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 유달리 피부가 까만 환자, 울음비친 어린시절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삶의 현장을 사실적이지 않고 뒤틀리고 불분명한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이는 자기 밖의 세계를 자기 안에 중심화 한데서 가능했던 자기만의 세계이며, 한정된 운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집념의 결과가 아닐까. 괴롭고 거친 삶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긴장감이 있고 고독한 삶에 스스로 위안하기도 하는듯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창출해 낸다.
대상의 자기 동일화(Identify)이다.
자기연민과 소외, 그리고 고독과 단절에 대한 자기위안이라는 복합적인 심리가 이탈하지 않는 그곳에 늘 자신을 가두어 두면서 그 가둠 속에 삶의 자유를 획득해가는 현실주의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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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담의 표정, 그 표정에 나는 무슨 할말이 있어야 한다
그 할 말을 그리자

어지럽게 덧칠하는 붓자국과 거칠고 날카로운 나이프의 흔적은 내면적 상흔의 심리적 발현이며, 누군가 대변해 줘야 할 이웃에 대한 배려이자 고뇌다.
소외된 변두리 인생일망정 열심히 살고 있는 삶의 경건함과 물질화된 도시공간의 비정과 어두움을 응시한 것이며, 자기 자신과 냉정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선을 획득했다.
『처참한 생존의 다툼, 전율과 공포의 신음소리가 정확한 객관묘사의 냉정함보다도 사물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하므로써 전체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시적 언어를 구사한다』

원동석교수의 그의 『공작도시』연작에 대한 평이다.
그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아현동의 회색빛 돌계단과 외롭고 쓸쓸한 뒷골목 풍경을 통해 세계와의 단절을, 손수레를 끄는 행상인의 외침을 통해 소외에 대한 내면적 절규를, 산밑 동네의 무번지의 황량함을 통해 내면의 어둠과 침묵을, 이른 봄날 고층빌딩 옥상에선 할머니의 뒷모습을 통해 잃어버린 그의 과거를, 도심 속의 고독한 모이를 줍는 자신의 모습을 명동의 비둘기로 재현하고 있으며, 난지도의 판잣집 앞에 웅크린 사람들과 그 너머로 보이는 교회의 풍경, 고층 빌딩의 대비적 묘사를 통해 인간에게 희망은 무엇인지를, 산동네가 건너다 보이는 골목어귀 기대어선 아낙네의 웅크린 모습에서 삶의 기다림은 또 무엇인가 하는 강한 의문을 던져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내적 독백은 모순투성이의 인간의 삶에 대한 부정이며 항거이다.
 인간의 외로운 모습. 길들이 상하좌우로 교차하는 음양 속에 파묻힌 먼 동네의 모습은 대부분의 우리 인간이 갇혀 사는 삶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었다.

부르짖을 수 없는 나의 음성은 노래가 되지 못한다
그래 잡기장의 한 줄 글로만 적혀진다.

그의 화면에 살아나는 풍경이나 인물은 그들 자체의 현실적인 존재를 말하기 위한 한 측면에 대한 클로즈업이다. 이를 통해 사회구조를 밝혀내고 보이지 않는 모순을 들춰내어 보이며, 회복되어야할 무엇에 대한 강한 역설이다.
인간의 비정함, 소외되고 찢겨진 삶에 대한 조형화는 인간회복을 갈구하는 그의 피맺힌 절규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자화상 이외에 구체적인 인물화가 없음도 이러한 그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화면 속의 인물은 한결같이 얼굴이 지워진 그림자 같은 사람이 등장하고 있음은 자기 외는 누구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자기 연민과 소외의 심적 표현이 분명하다. 이는 자기 삶의 심리적 분출이며 고독하고 아픈 영혼을 표현하려는 몸부림이다. 
 
이처럼 그가 그려낸 인간과 사회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보편적 삶의 모습이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마치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터널 속에서 그는 한을 소리 없이 잉태하고 있다
회색빛으로 한의 무게와 깊이를 더하며, 그러면서도 속도감 있는 화면 처리는 삶에 대한 차가운 미학적 거리에서 자신의 감정을 응고시켰다. 인고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실존적인 빛인 외로운 사람의 뒷모습 너머 멀리 보이는 사람의 마을을 묘사하는 원근법을 통해 그가 얼마큼 개성을 통해 모방과 타협이 아닌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뱉어낼 수 없는 것, 깊이 들이킬 수 없는 것, 지울 수 없는 것, 고칠 수 없는 것
어린 날의 나는 늘 서글픈 눈이 되어있었다
집 앞 배나무에서 첫 새벽부터 울던 그 예뻤던 새
그는 결국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되찾지 못한 채 영원히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예술가로서의 삶과 흔적은 그가 살아생전의 자화상이었던 “자라지 않는 나무”로 지금도 한국 화단에서 신나게 자라고 있다. 그는 아픈 질곡의 삶 속에서도 스스로 아픔과 운명을 시적 사유로 응시함으로써 그의 나무가 다시 자랄 수 있는 땅 깊은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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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들어야 한다는
투정 넘어로
희멀건 달이 얼굴을 내민다
어둠을 쪼개고
고통을 만지는
성자가 되어 온다
암흑을 물어오는
아이의 성숙 앞으로
아파하는 표정되어 피어나
망각의 침에
진실을 묻혀 꽂는다
해어진 옷깃 사이로
빈궁의 공기 스미어
갈망의 때가 끼인다
타오르는 분노가 입히는
악마의 허의(虛儀)를 찢어내는
수도자 되어간다
휘영한 그의 표정에
고통의 그늘 지우는 기도 있어
파닥여 오는 호흡깊이로
열락의 행자行者여
달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달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그는 지금 그가 살아 생전 그렇게 꿈꾸어 왔던 자유 속에서 벗고 싶었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외치고 싶었던 생의 찬가를 부르며, 태우고 싶었던 예술혼을 맘껏 태우면서 ‘행복한 달의 미소’로 웃고 있을지 모른다  
 
 
 
신병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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